가전제품, 우리도 편하게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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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소연 작성일21-11-23 16:23 조회4,7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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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인천 부평구의 한 아파트에서 뇌병변장애인 정용기씨(51)와 김경한씨(42)를 만났다. 하체와 오른손이 불편한 정씨는 가전제품 사용의 어려움을 말해 달라는 기자의 주문에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에 앉은 그는 몸을 비틀어 왼손으로 변기 오른쪽의 비데 버튼을 누르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생리현상이라 활동보조인에게 부탁하기도 그렇고 이게 가장 곤란하다”면서 “비데를 변기 왼쪽에도 설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거실로 이동한 정씨는 선풍기의 동그란 시간 설정 조작부를 돌리다가 털썩 넘어졌다. 그는 “이렇게 온몸을 써서 돌려야 겨우 작동할 수 있다”고 했다.
뇌병변장애인인 김경한씨가 버튼이 촘촘한 TV리모컨을 누르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박민규 선임기자
김씨는 TV 리모컨을 탁자에 놓고 “버튼 간격이 좁아 한번에 여러 개가 눌러진다”고 했다. 손이 떨리는 뇌병변장애인들에게 여러 기능이 촘촘하게 박힌 리모컨은 무용지물이었다. 최근 나온 리모컨에 있는 ‘휠’은 더욱 사용이 어렵다. 그는 “버튼 간격을 넓게 해서 자주 쓰는 기능만 몇 개 있는 리모컨을 고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씨와 김씨의 하소연은 30분 넘게 이어졌다.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긴 장애인들에게 가전제품은 가장 자주 접하는 소비재인데, 소비자로서 가전제품을 편하게 쓸 권리는 누리지 못하는 듯 보였다.
특히 요즘 일반화된 터치식 입력과 조그셔틀이 장애인들을 더 힘들게 한다. 정씨는 “전화가 오면 스마트폰 화면에서 녹색 수화기 그림을 터치해 옆으로 제껴야 하는데, 우린 그걸 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스마트폰은 가운데 하단에 눌리는 버튼이 있는 5년 전 모델이었는데 전화가 왔을 때 버튼만 누르니 손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요즘 폰들은 가운데 하단의 버튼이 없어져서 바꾸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이민석씨(33)는 “현관문 번호키가 옛날엔 버튼이어서 손으로 만져 누를 수 있었는데 지금은 터치식이라서 카드키를 놓고 나오면 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럴 땐 지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비밀번호를 누를 수 있게 안내를 받는데, 비밀번호 노출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시각장애인 하유리씨(33)는 세탁기의 조그셔틀에 대해 “끝도 없이 돌아가고, 소리가 다 똑같으니 세탁 설정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장애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작동시켰는지 피드백(반응)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민석씨는 “에어컨을 켜고 10분 동안 기다려서 별로 안 시원해지면 냉방이 아닌가 하고 다른 버튼을 눌러본다”면서 “몇 도로 설정한 것인지, 지금 켠 기능이 뭔지 말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일러 역시 틀고 나서 방이 따뜻해지지 않으면 그제서야 ‘온수전용 모드’임을 안다고 했다. 터치식 쿡탑은 불이 켜졌는지 확인하려다 시각장애인들이 화상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청각장애인 주부 민서연씨(45·가명)는 “(세탁기가) 빨래가 다 돼도 음성으로만 알려줘서 깜빡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제품의 높이나 깊이, 구조 때문에 아예 접근하기 어려운 점도 지적됐다. 정용기씨는 “통돌이 세탁기는 위로 문을 열어 빨래를 꺼낼 수 없고, 드럼세탁기는 손가락에 힘을 줘야 해서 내 힘으로 문을 열 수 없다”고 말했다.
김경한씨는 “노트북을 혼자 잡고 열기 어렵다”며 “버튼을 누르면 열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장애인들은 의류관리기 버튼과 타워형 세탁기 상단부가 높아서 이용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 또 위아래로 열리는 오븐은 문이 휠체어에 걸려 접근하기 어렵다고 한다.
오른팔이 없는 상지장애인 박영임씨(46)는 “정수기도 뜨거운 물을 받으려면 한 손으로 버튼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 받게 설정된 제품이 있다”고 했다. 부주의로 인한 화상을 막기 위한 기능인데, 상지장애인들은 되려 화상의 위험에 노출되는 셈이다. 박씨는 “제품들이 다 오른손잡이 중심이라서 왼손으로 냉장고를 여는 것이 어렵다”고도 했다.
가전제품에 대한 기술표준이 없진 않다. 한국산업표준심의회가 수년 전부터 장애인과 고령자의 접근성을 고려한 기술표준을 만들고 있다. 일례로 2017년 12월 제정된 ‘가전제품의 입력방식 접근성’ 표준엔 ‘입력장치는 사용자가 시작점이나 기준점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기능 설정에 대한 피드백은 시각, 청각, 촉각 중 두 개 이상의 방법으로 중복해 알려야 한다’ 등의 조항이 있다. 이 표준을 만드는 데엔 삼성전자, LG전자, 코웨이, 쿠쿠전자, 리홈쿠첸 등 가전업체들도 참여했다. 하지만 제품엔 반영돼 있지 않다.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은 기술표준을 제품별로 상세화하고, 기업들을 유인·강제할 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장애인차별금지법이나 기술표준은 강제력이 없다. KS인증이나 에너지등급처럼 장애인접근성 등급을 도입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온다. 민용기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정책기획팀장은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일부 필수약에 시각장애인이 헷갈리지 않도록 점자 표시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다”며 “전자제품도 쿡탑과 비데 등 안전과 위생에 필수적인 제품부터 장애인 접근성에 대한 의무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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